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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울어진 글자는 외적 독백,또는 대화. 정자체는 내적 독백으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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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꿈에서 몇번이나 어린 널 만났던 날이 있었다. 아니, 새로이 너를 만났다고 하기엔 나또한 어려져 있었으며, 그 대화는 우리가 했던 기억 중 언뜻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사실 만남이라기보다 과거의 흔적에 가까울 것이다. 허나 그것을 회고, 또는 회상. 또는 추억, 또는 기억. 이런 단어들 중 어느 하나라고 정확히 명명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장면에 함유된 내 감정을 일컫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멍한 생각이 몽롱하게 머릿속에 차오른 새벽이었다.

' 걱정같은 걸 받으면, 계속 떠올라서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거든요~. '

 언제쯤일까? 잠에서 깨려 제 눈을 부비는 긴 손가락이 느릿하다. 더불어 머리회전도 둔한 시간이라, 끔뻑끔뻑 박자가 맞아지지 않는 눈두덩이를 올릴 힘도 부족한 것 같아. 결국 느리고 느리게 감는다. 닫힌 시야일수록 예민해지는 귓속을 어스름한 새벽녘의 찬 기운은 파고들었고, 가볍게 두드려진 시곗소리는 머릿속에 내려앉아, 제 무게만큼의 옛 적 일도 끌어낸다. 회상의 도르레 위에 얹어진 이 덩어리는 몇년 전의 것이었을까. 7학년.. 5학년.. 4, 3학년. 그 때즈음 같아. 웅얼이자 말로 뱉어진 단어는 그 시간대에 고정되어, 흐릿하던 기억은 조금이나마 선명해진다. 그래, 그 때도 이런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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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왜 여기서 일어났습니까?"

 수업에 들어가기엔 한참 이른 네시 반. 비틀비틀, 잠기운에 정신을 못 차리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나를 건져준 네가 했던 물음이다. 아직 나보다 조그마하던 체구에서 나오던 힘이 낯설어 그제사 조금 놀란 눈을 감았다 뜨길 여러번. 희게 그늘진 새벽녘의 네 머리칼에 잠시 시선을 두다, 자꾸만 감기는 흐린 금안을 다시 한 번 질끈 감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더랬다. 네가...내 침대에서 자던데. 자리를 잘못 찾은 것 같았어. 웅얼이며 대답하자 바라봐주는 한쪽의 자안을 마주하는 게 어쩐지 뿌듯하고 생각했다. 두루뭉실해진 표정로 베개에 얼굴을 묻자 제 삐죽이는 곱슬머리를 느릿하게 쓸어주는 손길이 어쩐지 편하다. 거..깨우지 그랬습니까~놀랐잖아요. 그리고 잠은 좀 깨고요. 답변과 함께 눈 앞에서 작게 쳐지는 박수에 웃음이 나오는 것도 어쩐지였지. 그 때 즈음부터 어째서인지 네 앞에서 비실비실 옅은 웃음이 새는 걸 참곤 했었는데, 이제서는 아는 이유지만. 정작 그 시절엔 짐작조차 못 했을 관계였던지라. 아, 그때도 좀 둔했던가. 하품하며 다시 기억으로 들어가자 너는 금방 퍼득이며 자리에서 벗어나려 들었던 듯 싶다. 나 렉서스 도련님께 인사가야 해요. 하며 이부자리를 벗겨내는 널 보며 꾸물꾸물 네 몫의 베개를 아쉬운 손으로 움겨쥐었던 3학년이란.

" 더 자고가지. "

 또한 괜한 웅얼임이었나. 덩치와 맞지 않게 바르작거리며 조용히 중얼였던 걸 기억한다. 그 즈음의 어린 나는 내 소망이나 바램따위을 입 밖으로 낸다는 자체가 낯설었어서, 소리내고서도 들리지 않았겠지. 들리더라도 부담이었을거야. 미리 머쓱해하며 갈빛의 손가락으로 이불에 민망한 획을 한 번 그었다. 잠깐의 적막이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거든. 이상하게 들렸을까? 나는 그냥 네가 덜 피곤했으면 해서. 뭐라고 더 덧붙여야할까, 네가 조금 더 내 곁에서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이상하잖아. 자는 체 눈을 감고서도 속으로 간질거리는 고민을 하다 답이 아닌 네 답에 파드득 놀란 건 흔한 비밀이었다. 

 꿈에서 누가 루를 재워줬거든요...당신이었을까? 미성의 목소리가 내려앉고, 저 답이 허락인지 짐작하기도 전에 손이 끌어졌더랬으니 말이다. 그 두근거림 앞에 비밀이 아닐 게 무어가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기다리기라도 한듯 끌려가 다시.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듯 다시. 네게 이불을 덮어주곤 쿵쿵 울리는 울림을 무시한 채 토닥토닥 다시 너를 재우는 게 자연스러울리가 없었다. 이상했다. 낯선 만족감. 또 묘했던 새벽의 미열. 몽롱함. 그건 그저 그리핀도르의 치기어린 성취감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내 한마디에 홀린 듯 다시 누워주는 널 보며 한참 잠들 수가 없는 그것이 꼬마의 성취감이라기엔 렉서스는 그렇게까지 내게 이기고싶은 존재는 아니었고, 그런 미적지근한 온도라기엔 어쩐지 작게 흔들리는 심장이 너무 간지러워서, 네게 닿는 손바닥끝까지 간지러워지는 것 같아서. 괜히 널 도닥이는 박자가 자꾸만 삐끗거렸던 것 또한 비밀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므로.

".........루......?"

 이번에는 일곱시 정도였을까. 이후 또 뒤집어진 머리칼을 하고 일어났을 땐, 새벽녘의 울렁임은 잠시 잦아들어 이제 다시 숨을 쉴 수 있을까 싶었다만. 슬프게도 난 항상 네 앞에선 늘상 묘해지곤 해서, 빠르게 일어나는 네 뒷모습을 보며 혼자 간지러움의 여운을 찾았더랬다. 허나 어린 내가 느끼기엔 너는 내 앞에서도 달라짐이 없었고- 딱히 날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기에. 그저 어째 바빠보이는 얼굴로 후다닥 입는 와이셔츠를 아쉽게 보기도 한 시, 네 손에 쥐어진 내 빗자루에 멀거니 상황파악을 하려 눈을 깜빡이기도 두 시, 창 밖으로 뛰어든 널 보고 늘 차분하던 눈매가 휘둥그래 커졌던 게 세번째였다. 헉 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창가로 뛰어가 내려다보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아들어간 네가 보였을 때의 안도감을 알까. 이제는 간질거림을 뛰어넘어 겁먹은 듯 미치게 뛰었던 박동을 네가 알까. 괜찮다는 듯 손인사를 해줌에도 나답지 않게 눈매가 비죽 올라가는 것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스스로도 모를 비죽거림을 들리지 않게 내뱉으며 한참을 그리 내려다보다 수업을 향했다. 괜한 넥타이에 시비를 걸었던 것도 같지만, 난 왜 슬리데린이 아닌거야. 성질을 부렸던 것도 같지만. 또한 비밀이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

" 당신 주려고 몰래 가져왔어요~ 이거 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나눠먹어도 된다고 했거든요. "

"...................."

 그리고선 다시 만났던 수업시간. 다시는 뛰어내리지 말라며 잔소리에 잔소리를 하려했건만. 제 입에 스위츠를 톡 털어놓고선 톡 뱉어주는 이 말에 어째 조금 들어가지는 스스로의 삐진 입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저 말돌림이 뭐가 예쁘다고 자꾸만 노곤노곤 녹아내리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툴툴대고서도 제 입에 간식거릴 물려주는 손가락 끝이 고와서. 그 위에 덮힌 붕대너울마저 희어보일 정도로 미려해서. 네가 물린 설탕덩어릴 우물거리는 볼이 잦아들진 않았다. 허나 뛰어내리며 탑의 외벽에 긁히진 않았을까, 눈으로 가볍게 훑는 게 바쁜 탓에 스위츠의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우물대며 씹어 삼키곤 널 빤히 바라보길 몇 분. 종알대며 말을 돌리는 네게 시선을 맞추다 결국 아르릉거리는 위협이 새는 것이다. 다칠 뻔했잖아. 안 다쳐요! 곧장 따라붙는 대꾸가 괜히 야속해 고개가 팽 돌려진다. 이게 뭐라고 서운한지. 가장 서운한 건 내게 서운할 자격이 없는 것이었을까. 이유 모를 울컥함에 발걸음이 빨라져 타박타박 걸어가다가도,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하며 총총 따라붙는 네 한 순간에 순둥해지는 눈꼬리가 싫었다.

 요즘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지. 저답지 않은 스스로에 예민해져 그럼 걱정하지, 안 해? 톡 쏘다 혹여나 네게 짜증이 옮을까 싶어 한마디를 더 붙인다. 조마조마했단 말이야. 작게 덧붙이는 문장이 널 향한 조심스러움이라는 걸 인지함과 동시에, 네겐 그런 나를 향한 신중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또 억울해지는 것 같았다. 왜 나만, 왜 자꾸 나만 너를 신경쓰지? 아니, 물론 난 누구나에게 이렇게 신경써주곤 했지만. 동급생끼리 그게 맞는 거지만. 왜 너한테는 유독....나만, 나만 유독... 유치한 속앓음과 서러움에 입이 꾹 다물어지려는 것이 싫어 앞장서는 발걸음을, 오늘만큼은 늦춰주고 싶지않았다. 별로 상관도 없어할텐데. 그런 생각까지 도착하자 어쩐지 귓가가 화닥화닥 달아오르는 기분이 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했을까.

 덜 컸던 나는 늘상 편안한 곳에 머물었고, 그만큼 둔한 것에 익숙해져- 너와 있을 때처럼 파장이 흔들릴 때면 균형을 못 잡아 휘청휘청 거리는 게. 그 미성년의 나이에 얼마나 혼란이었는지. 혼자 앓기 시작한 감정에 함부로 너를 원망까지는 할리가 없어, 그저 스스로만 바보 취급하던 때. 맞아, 너는 별로 상관없어할텐데. 그런 멍청하고 서글픈 결론에 도달할 때쯤이면 네가 툭 던져오는 한마디로 사람을 흔드는 파장을 만들어내는 게. 그게 우리 관계의 중점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오늘은 나란히 안 걸어줍니까~? 무슨 표정인지 안 보여요~! 혹시 루한테 화났어요, 던컨? "

-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아직 너와 오랜기간 안 사이는 아니었지만. 네가 사람의 심정 한 가운데를 훅 찔러올 때가 있다고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별 의도를 실어보내지 않았음에도 너는 내 의중을 파악하는 대화가 잦았고,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가시에 찔린 도둑처럼 제 발이 저려 걸음이 늦어지는 것이다.

 이 날도 그런 나날 중 하나였을 터였다. 너보다는 내게 화난 것이었지만, 이거든 저거든 무슨 표정인지 보여줄 순 없는 게 정답이었던지라. 들킨 감각에 얼른 우물대며 서럽던 표정도 감춰야만 했었다. 네가 볼 땐 내가 서러울 이유가 없을 것 같았거든. 오히려 징그러워하지 않을까, 동급생이 다치는 거 하나로 뭐 그렇게까지 반응해요. 그렇게 웃어댄다면 나는 그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에 여려져, 분명히 마음이 다칠거야. 그런 여리고 어이없는 생각이 차오르곤 했거든. 그 때 즈음의 나는 네 말들이 물같기 시작하곤 했거든. 없으면 허덕이면서도 함부로 차오르면 눈물이 비죽 나던 네 물길이 내 감정의 시작점이다만. 혼자 시작한 감정을 함부로 내보이면 거부감만 살 거라는, 본능같은 예감도 있었던지라. 겨우겨우 뚱한 얼굴까지 온도를 올려내자 그제사 거리를 좁힌 네가 나를 보고 파학 웃는거야. 그럴 줄 알았지. 웃을 줄 알았어. 얼른 무뎌지려, 또 억지로 온도를 맞추려 하기도 전 소매로 문질러주는 그 작은 행동이 큰 일렁임을 만들어, 또다시 툭 떨어지는 건 내 심장이었다.

" 걱정같은 걸 받으면, 계속 떠올라서 정말 아무것도 못할 것 같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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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때구나..."

 지그시 눈을 감고 해낸 회상 끝에, 제가 찾던 기억의 조각을 잡자 그제서야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반복해 꾸던 장면이 어딘지 한참 헤매다, 겨우 기억해냈을 때의 이 뿌듯함이란. 아까보다는 아주 조금, 푸른 기를 덜어낸 창문께를 흘금 보다 다시 시선을 가져온다. 그에 보이는 시계는 여섯시 즈음을 향하고, 삼십 분정도 후라면 알람이 울릴 것을 예감해본다. 이 말은 아직 내 곁에서 색색대는 숨을 내뱉는 네가 깨기까지는 삼십여분이 남아있다는 소리였다. 평소보다도 더 일찍, 너보다도 빨리 깬 새벽이라니. 드문 이벤트였지만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다. 평소같았으면 다시 꾸물적대며 너를 안고 잠을 취했을테지만, 오늘은 이 생생함이 사그러들지 않음을 예감한다. 깨끗해진 머리 속에 다시 잠들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에 저를 안은 네 손을 풀고 바르작 대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네 얼굴을 톡 감싸쥐어본다.

"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고.... "

 이 중얼임은 5년은 지난 너의 말이었다. 걱정받으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다라. 멍하게 되내이며 주물거리는 손에 괜히 슬쩍 힘을 쥐어보자 네가 으르렁 거리는 듯한 소음을 낸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는 것이 드문 일일까? 또한 평소와 다르게도 손에 준 힘을 풀지 않자 네가 긍긍 앓다 결국 제 손아귀에서 얼굴을 팽 돌린다. 그것에 순간 겁이 나 다시 설설 네 볼을 풀어본다. 그래, 이게 나였다. 네가 내게 너무 소중해, 잡은 손아귀에 힘조차 주지 못하는 게 내가 아니던가. 너는 내게 너무나도 귀한 존재라, 차마 잡아쥐기도 버거워하던 게 내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걸 새삼스레 되내이는 것은, 스멀이며 올라오는 염(念)의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3학년의 그 투닥임. 저가 기억하기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못 하고 끙 소리를 내며 넘겼던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사실, 이런 작다란 충돌은 있어본 것이 아니던가. 아픔을 대수롭지 않은 너와 네 아픔이 대수로운 나. 그럼 어찌해야 하냐는 너와 그것엔 대답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나. 다시 그런 나를 잡는 너. 모두 다른 사건이었지만, 가끔 비슷한 기류를 느낄 때마다 스스로에게 의아하곤 했다. 네 말이 맞아, 하고. 나는 너를 어쩌고 싶은 걸까, 하고.

" ........ "

마냥 말끄러미 바라보던 얼굴은 어느 새 네 위로 올라타 있었다. 납작하고 흰 배 위로 무게감을 싣지않게 올라앉음에도, 잠결에 응얼이는 소릴 내는 네 입술에 손을 뻗어 문질러본다. 나는 너를 어쩌고 싶은 걸까, 루.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지는 것만 같았다. 허나 중얼이는 것이지, 그게 낮게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반복된 꿈, 반복된 기시감은 오늘 새벽에야 내게 답을 던져주었으니. 사실 이미 제 안에서 답은 나왔지만, 괜한 혼란에 혼잣말을 던지는 것이다. 루, 내 눈 색이 마냥 청결한 금빛이 아님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따금 이렇게까지 어둑해질 땐 거울조차 보기 싫곤 했어. 그렇지만, 이것또한 자신인지라. 어쩐지 너는...

" 나를 다 받아줄 것만 같아서.... "

 그러면서도 차라리 깨어나라는 듯, 목소리를 줄이지 않는 건 여즉 내가 너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차라리. 지금 나의 소음에 네가 내 아래에서 눈을 뜨고 안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잠들자고, 더 자라고. 그렇게 말하며 안아준다면. 눈을 감음과 동시에 지금의 내 감정을 다시 덮을 수 있지 않을까? 잠과 함께 날려보낼 수 있을거야. 이 울컥거리는 욕망따위를 내버리고 다시 네가 사랑해주는 밝은 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텐데. 여전히 너를 소중히 여길 수 있을텐데. 

 그러면서도 네가 깨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를 계속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보듬고 싶으면서도, 네가 모르는 새 너를 삼키고 싶어지는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염원은 충돌되어 자꾸만 제 안에서 부싯돌마냥 번뜩였다. 그에 발하는 빛이 제가 모르던 제 모습을 비치는 것을 이제는 안다. 느리고 늦게, 이제야 마주한 그것을 잡은 제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제 아래 깔려 잠든 널 눈에 담다 턱선에 짧게 입맞추는 것이다. 사랑하는 루. 나는 너를 어쩌고 싶었던 걸까. 나는 네게 뭘 원했던 걸까.

" ...아무것도 못 하는 걸 원했을 테지. "

묵직한 한마디를 내뱉자 그 원색적임과 솔직함에 스스로도  덜컥 겁이 차올랐다. 몇 번을 반복했던 너와의 다툼의 기류, 몇 번을 반복했던 네 앞에서의 얼버무림. 몆 번을 반복했던 꿈의 결론은 결국 이것이었다. 걱정같은 걸 받으면, 계속 떠올라 아무것도 못할 거라던 너를 보며. 나는 늘상 고집스럽고 다정히 너를 걱정해오면서도, 동시에 시커멓게도 차라리 내 곁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남아있어 줬으면. 하고 바란 것이었다.

 행동의 제약이든, 마음의 제약이든 뭐든 좋아. 그저 내 품 안에서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어. 응, 그냥 내 품 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말고...나만 보고서, 그랬으면 좋겠어.

 단어에는 힘이 있다는 걸 익히 들어왔지만, 이정도로 체감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내뱉고나니 쿵, 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이다. 덩달아 인정하고 나니 모든 퍼즐이 차례로 떨어져 내려와버리는 그 감각이란. 다 괜찮아하면서 네 상처에 왜 그리 예민했는지. 그래, 나는 널 소중히 여기면서도. 동시에 '내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내 사랑하는 이에게, 내 것에게 흠집나는 것에 너무 화가 났던 거야.

제 집착의 덩어리가 한마디 한마디 네 위로 떨어질수록, 제 속의 가장 검댕을 만지는 희열과 동시에 네게 죄를 짓는 기분도 차오른다. 그렇게 너를 얽매는 것이 너를 시들게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동시에 너는 나보다도 강하고, 나보다도 자유로워서. 매듭지어봤자 원치 않는다면 찢고 도망갈 것임을 알기에 씁쓸하다.

 그러나 동시에 네가 정말로 그래준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게 매여준다면. 하는 작다란 상상에 기분이 절로 좋아져, 눈매가 조금 휘어지는 것또한 어쩔 수 없는거야. 새벽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잠결에 깬다고 해도 내 이런 웃음은 그저 꿈이라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네게 이렇게 못되게 웃을리 없잖아. 그렇지? 웅얼이며 지분거리던 입술을 흰 목덜미로 내린다. 밤의 네게 배운 그것을 그대로 학습해 새벽에야 되돌려주듯 몰래 물어대는 게, 스스로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주 이따금, 자꾸만 네 앞에서 가라앉는 나를 보며 당황스럽곤 했다. 어릴 적부터 너를 보면 아랫배부터 목까지 드글하니 척추선을 타는 무언가가 일곤 했기에. 간질거림이라고 하기엔 무겁고, 혐오라고 하기엔 너를 너무 원해서. 짐작할 수가 없기에 갸웃거리며 덮어놨던 이것이 소유욕일 줄 누가 알았겠어.

 완전히 깨닫고나자 그 후부턴 제 손이 움직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막을 수 없다는 것조차 핑계야. 나는 너를 원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동양의 어느 속담에 -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하지 않던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직면하고 나니 제 평소의 살금살금 눈치보던 그건 어디가나 싶다. 곧이어 평상시의 조심스러이 구는 자욱이 아닌, 탐욕스러운 허덕임이 섞인 입맞춤을 섞어 쇄골에 집착하자 제 자국이 남는다. 그것이 만족스럽다. 제 자국이 몇개 생긴 너를 보며 숨을 몰아쉰다.

" .....하하...."

 자꾸만 머리가 취한 것처럼 쩡쩡 울리는 것 같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너를 원해왔다는 열쇠를 받고 나니, 자신도 몰랐던 행동의 해답이 쏟아져나와 그 생각들에 취하는 기분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심취하는 건 언제나 피하려 해왔는데, 네가 연관되면 늘 이렇게 허물어지곤 했다. 결국 몇번이나 그 물길을 들이마시며 너를 찾는 것이다. 내가 너를 원해왔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에 웃음이 났다. 자꾸만 제가 획득한 답을 늘어놓는 문장들이 새고 있었다.

" 맞아, .... "

 

 너와 서로가 닿는 게 어설플 나이부터 해온 스킨십에서, 어쩐지 '나도..'하고 배우고 싶은 첫번째를 고르라면 이 키스마크였다. 이유도 모르고 냠냠 물어대며 배워내곤 했는데- 나는 제 것이라 자국을 남기는 게 너무나 좋았던 것이다.

 맞아, 너와 사귀고 나서 제 집을 관리해주지 않겠냐 물었던 저를 기억한다. 그땐 제가 말하면서도 왜인지 몰라 얼버무리며 정리되지 않은 단어를 아무렇게나 늘어놓았건만, 나는 그때부터- 이미, 네가 허락한다면 널 내 울타리 안에 가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 쯤되자 이제야 자각한 스스로의 둔함이 한심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조금 징그럽다고도 생각한다. 네가 잠든 시간에야 얄쌍하게 웃어봤자, 막상 네 깨어난 웃음을 보면 어찌 하지도 못하면서. 뒤를 쫓는 스토커마냥 음침하게 새벽녘에 네게 키스하는 날 보며 정 떨어져요, 하고 웃어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또는- 어쩌면 알고서도 스리슬쩍 넘길지도 몰라. 너는 이따금 그랬잖아, 나보다도 빠른 회전으로 대화를 톡 넘겨버리곤 했지.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지? 내 간절함을 아무것도 아닌양 냉큼 삼켜버리면? 사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밤의 공기란 헛생각들을 만들어내곤 하잖아. 덕분에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심술이 치솟아 네 몸을 훑으며 잘근 물어대던 힘이 조금 강해졌을까. 깼는지 아닌지 윽,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허나 상관없다는 양 네 몸을 연신 지분거리는 게 저같지 않음을 안다.

" 루-............ "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직 어스름해 뭔가 씌이기라도 한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아니야, 이것이야말로 제 가장 근원적인 속내인 걸 본능처럼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 일어나지마, 이런 나는 조금 이상해 보이잖아. 네가 좋아하는 건 다정하고 친절하고. 네게 뻘뻘거리는 내 모습일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잖아. 하지만 일어나 줘. 어서 깨어나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들어줘. 섞인 마음을 주체를 못 하겠어 자꾸만 네 잠든 입술을 찾는다. 자국을 남긴다. 이제는 네 손목까지 들어올려 야금 자국을 남겨대는 게, 거진 발정기라도 온 짐승같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콰득콰득 삼켜 제 것으로 삼고 싶은 이걸 어떡해. 묶든, 부수든, 제 안에만 가득하게 집어넣어야 만족할것만 같았다. 난 널 조각조각내야만 만족할런지, 식욕에 가깝다고도 생각할 탐욕을 느낀다. 루, 그러니까. 나는 ....

" -............. 너무,... 좋아해......"

  허덕이는 숨과 뜨거운 제 온도 위에서 드러내는 감정인데도 왠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짝사랑이 아니건만 짝사랑을 또 시작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홀로 시작한 발정에 비참함을 느끼는가.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너 또한 나를 가득히 사랑해줌을 알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넘치는 불안감과 감정이 차올라 자꾸만 눈시울을 붉히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제 '스스로'의 열기를 감당을 못 할 것 같은 불안함. 내가 이대로 언젠가 너를 잡아먹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그래서 너를 아프게 만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그래서, 네가....

" .....나를 미워하게 되면. 나는 어쩌지...."

무서운 영화를 처음 마주한 아이처럼, 쿵하니 심장 아래께가 저려옴에 빠르게도 눈물이 핑 고인다. 저 혼자 좋아하는 마음을 감당을 못해 웃다 우는 새벽녘의 사내라니, 미치광이와 다름없지 않는가. 그렇지만 알게될수록 정상이 아닌 것처럼 좋아하게 되는 이걸 난 어떻게 해야해.

 이제는 제 금안이 밝지도 어둑하지도 않고서 그저 흐릿흐릿, 물기가 그득해짐은 뻔한 일이었다. 사랑이든 집착이든, 네 앞에서만 서면 잔뜩 약해지는 이게 결국 내 금빛이던가. 네가 받아주는 만큼 한가득 기대는 법을 알아버린 나는 애석하게도 잠들어있는 네게 연신 이마를 부빈다. 그 흔들림에 네 눈두덩이에 제 눈물이 투둑 떨어지자 괜히 네가 우는 것 같았다. 그게 싫다. 내가 널 좋아할수록 네가 힘들어질 거라는 암시일 것만 같아 얼른 닦아버린다.

 아닐 수 있다. 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숨길 수 있다. 나는 다른 연인들처럼, 적당히 너를 사랑할 수 있다고. 훌쩍거리는 한심한 열아홉은 이 순간마저 평범한 제 사랑의 열병이라는 걸 알기엔 여전히 둔한 인물인 것이다. 소년에겐 울만큼의 사랑이란 너무 낯선 것이라, 감정보다는 차라리 병 같았다. 옮겨선 안되는 희귀병. 그렇기에 질병을 옮겨내지 않으려,  너는 잠들어있건만 나는 허공에만 저를 받아달라 우는 소리를 내며 칭얼칭얼 몸을 붙여온다. 루, 내가 잘 할게. 너무 좋아해...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내게 잡혀주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냥, 그냥 너는 지금만큼...이렇게 벅찰만큼 나를 계속 좋아해줘...

" 사랑해...... "

결국은 흔하디 흔한 고백을 핑계로 써 잠든 너를 꾹 끌어 안는다. 이따위 단어보다 제 애정이 미쳐감을 안다. 단어 하나로 부족해, 하는 연인들의 언어가 내게는 너무 위험한 뜻임이 와닿자 답답함에 심장이 터질 거 같았어. 더, 더 와닿는 단어가 필요한데. 그런 단어는 네게 무섭게 와닿을까 겁나. 그러니까 오늘도 사랑한다고만 말할게. 넘치는 마음을 꾹꾹 나눠담아서 사랑한다고만 말할테니. 지금처럼 나를 예뻐해줘.

스스로를 죽이는 훈련이라도 하는듯한 폼새였다.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제 고통에만 심취해 너를 원망하게 되지도 않았다. 지금의 저를 살짝 죽이는 게 결국 너를 생기넘치게 만드는 일이고, 그게 결국 우리를 살릴만한 길임은, 쉽게도 알 수 있었으니. 꺾어진 꽃이 시드는 것쯤은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너도 나만큼 날 갖고싶어 했더라면, 서로 날개를 부수고 족쇄를 쥐는 걸 행복하게 여기는 이라면. 그렇다면 또다른 엔딩이 있을까? 이런 미련이 돋는 건 조금만 봐줘. 나도 욕심있는 사람이라, 판타지를 꿈꾸나봐.

 그렇게 연신 덧붙이며 이마를 부비고, 입술을 부비고..눈물 새에서 숨을 고르다 훌쩍이기까지 네 어깨에서 겨우 진정해낸다. 저도 모르는 새 고통을 참듯 몇번이나 물어낸 네 쇄골과 어깨죽지에 쪽쪽 입맞추며, 저를 달래는지 너를 달래는지 모르게 굴자 이내 여섯시 반을 울릴 알람이 보인다. 곧 네가 깰텐데. 그 때 눈이 부어있으면 안되는데. 숨이 울음에 들떠있으면 안되는데. 진정하려 호흡하곤 다시 느릿느릿 네 옆자리로 자리를 잡는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지만, 이것또한 가까이의 행위라 나름대로 만족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가는 숨을 내쉬며 제가 앉았던 네 흰 배를 아팠을까 느릿하게 문질러보며 , 뒤에서 담듯 끌어안자 비슷한 체구덕에 흰 머리칼이 닿는 듯했다. 포근한 그것에 볼이 닿자 조금 차분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또다시 느긋한 체 숨을 들이쉰다.

 할 수 있다. 같은 하루일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잘 다녀오라고, 기다리겠다고 얘기하는. 내가 네 날개를 부둥켜안아, 나가지 말라고 꺾지만 않으면 우린 언제까지고 네가 아프지않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 몇 번 중얼거리고 나니 정말로 할 수 있다는 최면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응, 난 너를 사랑하니까. 괜찮을거야...지친 수면에 빠져들며 그따위 자기위로를 한다. 또한 네겐 그저 애교처럼 들릴, 고해성사를 뱉는다. 참아볼게, 열심히 참아볼게. 그러니 내 곁에서 아프면 안돼..중얼이며. 

" 사랑할게.... 네가 날 사랑해주는 만큼만."